쌓아보기/영화

[영화] ‘오디세이’ 300만 돌파! : 트로이 전쟁은 진짜 있었나?

The Nook 2026. 8. 14. 16:49
반응형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영화 《오디세이》를 관람한 관객이 오늘 300만을 넘었다.
IMAX로 봐야 진짜라는 평 때문에 상영관 암표가 고가에 거래될 정도다.

《호프》와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 이서 《오디세이》까지.
최근 찾아오는 관객수가 줄어 울상이던 극장 입장에선 이런 호기가 또 없을 거다.
물론 언제나 좋은 작품에 목말라하는 영화 매니아들에게도 선물 같은 나날들일 거고.

ἄνδρα μοι ἔννεπε, μοῦσα, πολύτροπον, ὃς μάλα πολλὰ πλάγχθη, ἐπεὶ Τροίης ἱερὸν πτολίεθρον ἔπερσεν·
"여신이여, 트로이의 신성한 성채를 무너뜨린 뒤 그 오랜 세월을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던, 그 지략 넘치는 사내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소서."
- 《오디세이아》의 첫 구절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Ὀδύσσεια)를 일컫는 영어 단어다. ‘여행’, ‘여정’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단어의 뜻대로, 《오디세이아》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이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겪는 고난을 담은 이야기다.
영화 《오디세이》 역시 원작 《오디세이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고.

In a time of Apparent Magic
마법이 존재하던 시대
- 영화 《오디세이》의 자막 중


자막에서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처럼 영화 안에는 마법 같은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신화 속의 신들과 영웅들이 두 패로 나뉘어 벌인, 그야말로 신화시대의 시빌 워라 할만한 트로이 전쟁.
초인에 가까운 영웅들의 격돌과 그를 지원하는 신들의 기적들.
그리고 트로이의 거대 성벽, 그리고 그것을 깨트리기 위해 동원되는 트로이의 목마 속임수.
거기에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의 앞을 가로막는, 현실에 존재할 리 없는 외눈박이 괴물과 거인, 마녀, 거대한 소용돌이와 바다 괴물.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그러나 비현실적인 사건들로 가득한 이 트로이 전쟁과 그를 기록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사람들에게 허구가 아닌, 실존하는 사건에 신화적 상상을 얹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트로이 전쟁이 기원전 1194년에서 기원전 1184년, 그러니까 에라토스테네스 본인이 살아가던 시기로부터 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추정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원정 직전 트로이 유적에 방문해, 페르시아 원정을 ‘그리스가 아시아에 복수하는 트로이 전쟁의 재현’으로 연출하며 사기를 높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아스의 후손이라 주장했고, 아우구스투스는 베르길리우스에게 아이네아스의 일대기를 담은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집필하라 지시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아이네이스를 낭독하는 베르길리우스


우리나라 고대 역사에도 단군 할아버지가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여 사람으로 바꾼 일화라든가, 주몽이 알에서 태어난 천신의 자손이며 그가 부여국을 탈출할 때 자라와 물고기로 이루어진 다리가 생겨났다든가 하는 비현실적 사건들이 존재함에도 고조선과 고구려의 건국을 실존한 역사로 받아들이며 이러한 사건과 분리해 인식하는 것처럼, 서방 왕조의 지도자들 역시 트로이를 실존하는 역사로 인식하고 정치적 명분으로 삼았다는 거다.

_____

“그럼 트로이 전쟁은 진짜 있었던 일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 밝혀진 바는 ‘확실하진 않지만, 정황 증거는 있다’는 거다.

사실 트로이의 존재와 트로이 전쟁이란 사건은 19세기 이전까진 허무맹랑한 신화 속 이야기라고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심취한 끝에 그 안에 담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 믿게 된 한 남자의 집념 어린 발굴이 있기 전까진.

하인리히 슐리만


하인리히 슐리만.
독일의 사업가 출신 아마추어 고고학자.
어릴 적 위인전 한편을 차지하기도 했던 인물이지만, 실제론 학자라기보단 트로이에 심취한 오타쿠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 사람이다.
그는 집념 어린 조사, 추적, 발굴 끝에 홀로 트로이 유적을 찾아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프랭크 캘버트’라는 고고학자가 탐색을 마친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직접 삽을 들고 뛰어든 것이었다.

프랭크 캘버트


게다가 슐리만은 그 과정에서 발견된 황금 장신구와 그릇 등을 제멋대로 ‘프리아모스의 보물’, 그러니까 트로이 전쟁 당시 왕이었던 프리아모스의 것이라 정의(물론 근거 없이)하는가 하면,
발굴한 보물을 아내에게 걸치게 하고 사진을 찍어 신문에 대대적으로 공개하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발굴된 유물을 걸친 슐리만의 아내 소피아


하지만 슐리만이 발굴하고 트로이 전쟁 당시의 것이라 여겼던 트로이는 사실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천년 전인 기원전 2500년 경의 것이었다.
거기에 그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트로이 전쟁 때의 트로이 시내와 성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체계 없는 발굴 과정 중에 상당 부분 파괴되어 버렸다.

트로이 전쟁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6기 성벽

출처 : Wikimedia Commons ("Walls of Troy (2)" by CherryX, CC BY-SA 3.0)


슐리만이 당시 소아시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 정부 몰래 독일로 빼돌린 유물들은 2차 대전 때 소련군에 의해 약탈당해 지금은 러시아가 소장 중이다.
그 결과 독일과 러시아, 오스만 제국의 뒤를 이은 튀르키예와 그리스. 이 4개 국가 사이에 슐리만의 유물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여러모로 막장이었고 언플로 점철되었지만, 슐리만은 당시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트로이 유적을 지면 위로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트로이 유적은 기원전 2500년에서부터 기원후 500년에 이르는 2000년의 시간 동안 멸망과 쇠퇴, 재건을 반복하며 이루어진 9개 층으로 겹쳐 쌓인 복잡한 형태였고,
덕분에 슐리만 본인조차 자신이 찾는 트로이 전쟁 당시, 즉 대략 기원전 1750년에서 기원전 1180년 사이에 형성된 6~7a기 유적을 분간하지 못하고 엉뚱한 유적을 자신이 찾던 것이라 여기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슐리만이 트로이 전쟁 시기의 것으로 착각한 2기 유적

출처 : Wikimedia Commons ("Turkey-2937" by Dennis G. Jarvis, CC BY-SA 2.0)


_____

이후 학자들은 슐리만에 의해 존재가 확인된 트로이 유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몇 가지 사실을 정의했다.

- 트로이라는 도시는 실존했고, 여러 차례 파괴됐다.
유적이 위치한 히사를릭 언덕은 9개 층위로 이루어진 고대 도시 유적이며 그 사이 크고 작은 전쟁의 흔적이 여럿 발견되었다.

- 에라토스테네스가 추정한 트로이 전쟁 연대에 대규모 화재 및 파괴의 흔적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유적에 남은 흔적들은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다 확언하기엔 부족했다.
지금까지도 여러 논쟁이 있지만, 학자들은 호메로스가 단 하나의 대전쟁이 아닌, 수백 년에 걸쳐 벌어진 여러 차례의 전쟁과 충돌을 하나의 서사로 압축해 각색했다는 결론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트로이로 들어가는 목마


헬레네의 납치, 신들의 개입과 영웅들의 집결, 그리고 열흘간의 결전과 도시를 멸망시킨 거대한 목마.
수많은 명화로 남은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이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오디세이》 속 이야기가 시작되며 언급되었던 ‘마법이 존재하던 시대’, 즉 현실과 신화를 구분할 수 없는 때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