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보기/영화

[영화] <관상>과 <아마데우스>: 시대의 끝에서 홀로 남은 이들

The Nook 2026. 8. 14. 11:45
반응형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사람의 발길이 드문 외딴 방에 홀로 머물던 노인이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을 친다.

발작과도 같은 주인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놀란 하인들이 황급히 달려온다.

문은 잠겨 있고, 방에 틀어박힌 노인은 뭔가에 놀란 듯 고함을 치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문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하인들은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들이 그 안에서 본 것은...

 

영화 <관상>(2013)의 첫 시퀀스는 <아마데우스>(1984)의 오마주라고 불러도 될 만큼 닮아 있다.

생의 끝에 몰린 노인이 지난 세월 동안 그를 압박해오던 공포(혹은 죄책감)를 이겨내지 못하고 광증을 보이는 것도, 뒤늦게 자신을 찾아온 하인(혹은 신부)에게 자신의 반생을 털어놓는 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사실 영화 속 두 노인 한명회(1415~1487)와 살리에리(1750~1825)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과정에서 ‘살생부’를 작성해 조정의 대신들의 삶과 죽음을 쥐락펴락했던 냉철한 책사였고, 살리에리는 젊은 나이에 빈 궁정작곡가의 위치에 올라 평생 궁정악장의 자리에서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작곡했던 음악가였다.

 

평생 피를 보며 살았던 책략가와 고위직에서 작곡만으로 평생을 살았던 음악가.

엮일 일이 없을 것 같은 두 인물이 비슷한 시퀀스의 영화로 엮인 것은 <아마데우스>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기해 살해했다는 ‘모차르트 독살설’을 차용해 이야기로 만들어낸 피터 셰퍼의 희곡을 영화화했기 때문이다. 

천재를 시기해 죽인 평범한 음악가와 권력을 위해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정치가는 더 이상 천재성도 권력도 필요가 없어지는 인생의 말미에서 홀로 남게 되었다. 그들과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경쟁하며 같은 시대를 부대끼며 살아왔던 사람들도 더 이상 없고, 그 가치를 위해 불태웠던 열정과 시간도 깊은 주름과 하얀 머리칼만 남긴 채 사그라들었다.

그들이 닦아놓은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이 없이도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주변에 남은 것은 그를 광증에 시달리는 노인으로만 기억하는 어리석은 하인들 뿐이다.

 

장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오복 중 으뜸이라 하였다.

하지만 시대의 끝에 홀로 남은 노인들에게 그들이 누린 수복이 진정으로 복으로 다가올런지는 알 수 없다.

2011년 5월 5일, 영국인 클로드 스탠리 슐스 씨가 1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4살 나이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양대 대전을 모두 겪었던, 마지막 ‘세계대전 참전자’였다.

전쟁을 낭만적인 것으로 여겼던 20세기 초의 사회상을 삶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그가 끊임없이 일갈했던 ‘평화’라는 가치에 담긴 것들을 그 시대를 책과 영화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목이 잘릴 팔자’라는 예언이 맞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숨을 거두었던 <관상> 속 한명회와 ‘나는 평범한 이들의 챔피언’이라 자부하며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사하며 사라져 갔던 <아마데우스> 속 살리에리는 그 자체로도 비극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일은 그들이 ‘아무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는 시대의 끝’에 홀로 남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외로움이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회’ 자체에서 유리되어 시대의 끝에서 홀로 남은 이들은 어떤 심정으로 살아갔을까.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절에 ‘응답하라’며 외치고 있는 우리들은 언젠가 ‘응답하지 않을’ 시대의 저 편 끝에서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야 할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