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적이기

[일상] 아이 손아귀 색종이 한 장 속 종이접기의 역사

The Nook 2026. 8. 13. 22:25
반응형

 
 

요즘 아이가 푹 빠져 있는 건 색종이다.
유치원에서 몇 가지 종이접기법을 배워 온 이후, 매일 저녁 테이블 앞에 앉아 종이접기 삼매경이다.
아직 접은 부분을 단단히 눌러 다질만큼 손 힘이 강하지 않아 쭈글쭈글해지기 일쑤지만, 기어이 목표한 것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대견하다.
 
광고지를 주워다 비행기, 배, 동서남북이나 만드는 게 고작이었던 나때와 달리, 종이접기법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듯 하다.
복잡한 형태의 도구에서부터 합체하는 로봇까지. 색종이 여러 장을 각기 다른 형태로 접어 구성하는 기발한 방법들이 책과 유튜브에서 끊임없이 전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의 요청을 받고서야 알게 됐다.
 
휴일 오전 내내 방안 가득 색색의 색종이를 늘어놓는 녀석을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네모난 종이 한 장은 대체 어디서 왔는지.

'종이'하면 역시 이 사람, 채륜을 빼놓을 수 없다.

 
 

종이는 나침반, 화약, 인쇄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발명품이다.
기원전 중국 전한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후한의 채륜이 105년 경 제조법을 표준화해 지금의 종이와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그 기술이 실크로드를 타고 퍼져 '접을 수 있는 얇고 질긴 종이'가 퍼져나가게 된 거고.
여기까지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물건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놀아보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
접을 수 있는 물건이 생겼으니 당연히 그걸 접는 놀이가 여러 곳에서 생겨났다.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시대 이후, 무가 사이에서 서로 선물을 보기 좋게 포장하기 위한 예법으로서의 종이 접기, 이른바 '오리카타(折形)'가 생겨났다. 그리고 에도시대를 지나며 서민들의 놀이로 퍼지게 되었고, 1797년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접기 책, 비전 센바즈루 오리카타(秘伝千羽鶴折形: 학 천마리 접는 방법)라는 책까지 나왔다.

<비전 센바즈루 오리카타>

 

일본어로 종이접기를 '오리가미(折り紙)'라 부르는데, 원래 영어로 Paper folding이라고 불리던 종이접기는 미국 종이접기 협회 창립자인 릴리언 오펜하이머(Lillian Oppenheimer)가 Origami로 대체해 부르자 제안한 이후, 자연스레 영어로도 '오리가미'라 불리게 되었다. 종이접기용 종이 역시 'Origami paper'가 되었고.
 
사족이지만, 2010년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헤비 레인>에서는 희생자의 유해에 종이접기를 남기는 습성을 지닌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데, 이를 극중 인물들이 '오리가미 킬러(Origami Killer)'라고 부른다. 영어에서도 종이접기를 '오리가미'라 부른다는 걸 그 게임을 하며 처음 알았다.

이젠 고전명작이 됐구나.

 
 

유럽에서는 식사상에 올리는 냅킨을 다양한 형태로 접는 기술에 종이접기가 활용되었다.
그 외 스페인에서 새 모양 종이접기 '파하리타(Pajarita)'등의 종이접기법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한지의 생산국임에도 종이를 접어 모양을 만드는 문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한지를 가늘게 찢어 꼰 끈으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지승공예(紙繩工藝)나, 

지승공예로 만들어진 지승바구니 (출처:e뮤지엄)

 

종이를 물에 불려 죽처럼 만들어 형태를 빚는 지호공예(紙糊工藝)가 발전했다.

지호공예로 만들어진 과일쟁반 (출처:한국민속대백과사전)

 

아이들이 사용하는 현대의 정사각형 색종이는 세계 각지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독일의 교육자 프리드리히 프뢰벨(Friedrich Fröbel)이 유치원 교육 과정에 종이접기를 채택했고, 이 커리큘럼이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이 서구식 유치원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전통 오리가미와 혼합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치며 우리나라에도 자연스레 전파되었던 거고.

프리드리히 프뢰벨. 아이 키우는 부모라면 다들 아는 학습지 회사 이름의 그 분이다.

 

종이접기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면서, 아이의 손아귀에 쥐인 저 종이는 100년 전 독일의 교육과 일본의 접기 문화가 퓨전해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아이는 그런 복잡한 사정따윈 알 것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접고, 펴고, 끼우고 때론 자르며 종이접기를 즐길 뿐이지만.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접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종이 한 장.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종이접기의 연원 조사를 마친 내 입장에선 아이 손아귀 속 종이 한 장이 다르게 보인다.
어쨌든, 아이에게는 창작과 표현의 즐거움을, 아빠에게는 지적 허영 충족의 즐거움을 주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어쨌든, 아이에게는 창작과 표현의 즐거움을, 나에게는 지적 허영 충족의 즐거움을 주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반응형